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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amadeus 2008년 09월 23일 21시 43분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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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BlogIcon 장동만 2008년 12월 15일 11시 30분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Obamerica의 꿈과 시련 (상)


    1492년 콜럼버스의 발이 닿기까지 미 대륙은 인류 역사에 등장하지 않았다. 역사 뒤에 숨겨져 있었다. 남미 대륙엔 마야/잉카/아스텍 문명의 기록이라도 남아 있지만, 북미 대륙엔 아메리칸 인디언 여러 부족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 살았다는 사실 외엔 아무러한 역사 기록이 없다.

    이를 두고 고 함석헌 선생은 이런 해석을 하셨다.
    “하나님의 뜻이었다. 15 세기까지 꽁꽁 감춰 두었다가 세상에 내 보이셨다. 거기엔 하얀 색, 검은 색, 노란 색, 붉은 색, 모든 인종이 함께 모여 한 번 살아 보라, 인류의 理想國을 만들어 보라! 는 깊은 뜻이 있었다.”

    1776년 (한국 연대로는 이조 英祖 시대), 드디어 세계 각 곳 각종 인종들-초창기엔 주로 유럽계이지만-이 모여들어 미합중국을 만들어 냈다. 인류 역사 이래 최초 유일의 다 인종, 다 민족, 다 문화, 다 원화, 복합 국가였다.

    그로부터 230여 년, 그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최강국이 됐다. 그 짧은 기간 동안에 오늘날의 미국이 이루어진 것은 하나의 기적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 원동력이 무엇인가?

    그 기적을 이룬 원동력 중의 하나에 미국은 역사적인 원죄를 안고 있다. 흑인 노-//-예 제도다. 1863년 링컨이 노-//-예 해방-한국은 1894년 갑오개혁 때 軍國機務處議案에 의해 노-//-예(slavery)와 다를 바 없는 公/私 노비 제도가 법적으로 폐지되었다-을 선언하기까지 장장 87년 동안 노-/-예 제도를 유지했다. 그 기간엔 ‘건국 아버지들’의 “모든 人間은 평등” (독립 선언) 에서 흑인은 사람이 아니었다. 오직 “말하는 도구’일 뿐이었다. 곧 그 ‘人間’이 소외된 백인들만의 나라였다.

    2008년, 노-//-예 해방 145년 만에 드디어 흑인-엄밀한 의미에서 ‘흑백’이라고 해야 옳다. ‘피 1% 논리’는 백인 우월주의가 아닌가--대통령이 출현했다 (득표율 52%, 사상 최다 득표수). 백인 67%, 흑인 13%의 나라에서 그야말로 또 하나의 기적이 아닐 수 없다. 함 선생님 말씀대로라면 또 다른 “하나님의 뜻”이라고 볼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무엇이 흑인 대통령을 출현케 하였는가.

    이번 선거에서 가장 큰 이슈가 되고, 가장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화두는 ‘변화 (CHANGE)'와 ‘변혁 (REFORMING) 이었다. 그 기치(旗幟)를 흑인들, 소수 인종들, 투표한 백인 43%가 받아 들였다. 세계 제 1의 부국이자 강국인 나라의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변화’와 ‘개혁’을 갈망하는가? 그리고 그들이 그 같이 갈망하는 ‘변화’와 ‘개혁’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지금 미국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70%를 넘는다. 또 다른 조사에선 “미국의 전성기는 지나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48%나 된다. 무엇이 어떻게 그렇게 잘못되고, 잘못 되어가고 있는가?

    각종 통계를 인용, 오늘 날 미국의 현주소를 한 번 짚어 본다. (주: 모든 수치는 미 정부 기관 발표 및 신빙성 있는 여론 매체 보도 인용.)

    1) 사회 양극화, 빈부 격차가 너무나 심하다. 2005년 기준, 상위 계층 1%의 소득 규모가 미국민 전체소득의 21.2% (전년 비 19%상승)를 차지한다. 반면 하위 50%가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불과 12.8% (전년 비 13.4% 감소)이다. 고용 인구 중 연간 소득이 $27,000 (약2,700 원) 이하가 25% 이다. 한편 연방 정부가 정의한 ‘가난한 (poverty)'-가구 당 연 소득 $23,000 이하-사람이 인구의 12.37%를 차지한다. 빈부 격차가 계속 심화되고 있다. 이를 두고 EPI 재리드 번스타인 연구위원은 이렇게 말한다. ”소득이 이같이 상위 계층으로 집중되는 것은 민주사회에서 지속될 수 없다

    2) 미국은 총기의 나라다. “집안의 살인자 (Killer at Home)”, NYT가 총기 문제에 붙인 제목이다. 현재 미국인들이 보유한 각종 총기는 2억 5,000만 정으로 추산한다. 미국 인구 3억명 중 성-/-인 모두를 무장시킬 정도의 양이다. 매년 1만여명이 총에 맞아 사망한다. 2004년엔 총기 살인이 1만 654 건이었다.

    3) 미국은 감옥의 나라다. 성-/-인 138명 중 1명 (220만명)이 주립/연방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거나 국립/시립 구치소에 구금되어 있다(2005 년도). 흑인 남성(25-29세) 13명 중 1명 (8.1%)이 감옥에 갇혀있다. 전체적으론 10만 명 당 815명으로 백인의 6.6배(종신형은 백인의 10배)나된다. 한편 집유/ 가석방 상태에 있는 교화 대상 성-/인 인구가 700여만 명이 넘는다. 이번 대선 이후 인종 혐오 범죄가 부쩍 늘고 있다. (2007년 10월 현재 LA, NY 등 6개 도시 한국계 수감자 233명).

    4) 선진국 중 의료 혜택이 가장 뒤쳐진 나라다. 건강 보험 없는 사람이 4천 660만 명 (2005년 기준) 이다. 국민 부담 의료비가 1인당 연간 $5,700로 세계에서 가장 비싸다. 평균 수명은 日/英/加/佛보다 짧고, 영아 사망률은 쿠바 보다도 높다.

    5) “미국은 탈락 국가이다”, 몇 년 전 타임지 커버 스토리 제목이다. 미 전국 고교 중퇴 비율이 20% (5명중 1명)가 넘는다. 대학 진학률은 30-35% 안팎이다. 그러고도 2년-4년제 대학 중퇴 비율이 43%나 된다. 1992년 문맹률 조사에선 전체 노동자 계층의 4%가 기능적으로 문맹인 것으로 집계되었다.

    Obamerica의 꿈과 시련 (하)

    6) 미국은 세계 최대 대외 채무국이다. 2005년 말 현재, 미국의 해외 부채는 $13조 6,000만 (가구 당 $ 11만 9,000)에 이른다. 2006년 회계 연도 재정 적자가 $ 2,480억, 경상 수지 적자는 $ 8,570억, 합계 $1조 1,000억에 달한 다. 2014 년까지 누적 재정 적자가 $ 2조 3,000억이 될 것으로 전망한다. (2008년 9월말 현재, 중국이 보유한 미 국채는 $5,850억, 일본은 $5,732억, 영국이 $3,384억 이다-11/18/08 미 재무부 발표)

    7) 미국이 이렇게 천문학적인 ‘쌍둥이 적자’를 안고 있으면서도 경제가 그런대로 돌아가는 것은 소위 ‘달러 리사이클링 (dollar recycling-외국이 미국채를 사면, 미국은 그 국채를 팔아 얻은 ‘빚’으로 소비를 하고 투자하는 현상) 때문인데 이것이 언제 까지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이를 가능하게 하는 미 달러의 국제 결재 기축 통화 체제 그리고 미국의 달러 발권권(發券權)이 지금 큰 도전을 받고 있지 않는가.

    미국이 이같이 빚더미 위에서 ‘떵떵거리는’ 것을 두고 워커(정부 회계검사원) 는 말한다. “지금 미국은 로마 제국의 운명을 답습하고 있다 .

    8) 경제의 원동력이 생산/제조업에서 돈장사/금융업으로 바뀌고 있다. 일컬어 ‘경제의 금융화’다 . 1980년 대 초 미국 전체 기업 수-/-익 중 금융 부문 수-/-익은 10% 안팎이었다. 그렇던 것이 2000년엔 금융 부문 수-/-익이 40%로 증가했다. 세계를 풍미하던 ‘Made in USA' 제품이 사라지고 (GM등 자동차가 좋은 예다), 미 달러를 앞세운 돈놀이 (이번 금융 위기를 몰고 온 금융 파생 상품이 대표적인 예다)가 국내외 시장을 휩쓴다. 제조업이 쇠퇴하고 금융업만이 번성하는 경제 구조, 너무나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것이 경제학자들의 견해다.

    9) 2004 회계연도 미 국방비는 $4,915억 (GDP 대비 3.9%)이었다. 2008년도엔 $7,000억이 계상되여 있다. 군비지출 세계2위-15위 국가들의 군사비를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다. 한편 2008 회계 연도에 미국은 탱크, 전투기, 미사일, 군함 등 $320억 상당의 각종 무기와 군사장비를 외국에 팔았다.

    10) 매년 80만 명의 어린이가 실종되거나 납치되고 있다. 이중 4%가 시체로 발견된다.

    11) 저축률은 소득의 17%로 세계 순위 100위 안팎이다.

    12) 온실 가스 배출량이 세계 최고이다.

    13) 미 전역에 노숙자 (the homeless)가 60만 명이 넘는다.

    이상의 통계는 무엇을 말하는가?

    가장 잘 사는 나라, 가장 선진국이라고 자부하는 미국인들에게 그야말로 참기 어려운 치부이자 큰 수치(shame)일 수밖에 없다. 겉으로는 뻔지르르한 나라, 속으로는 이렇게 많은 문제를 안고 있으니 “변해야-/- 한다” “뜯어 고쳐야-/- 한다”.는 외침이 안 나올 수가 없다.

    이리해서, 백인 후보보다 변화와 변혁의 기치를 더욱 높게 치켜든 흑인 대통령이 탄생했다. 그런데 “인류 역사에 하나의 신화를 창조했다”는 그의 앞길엔 너무나 많은 장애물이 가로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변화’와 ‘변혁’은 어떻게 보면 일대 혁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에서나 어디서나 힘있는 사람들, 살 만한 사람들, 기득권자들은 결코 변화와 변혁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정치 경제 사회 외교 모든 면에 걸친 다양한 주창의 근저에는 하나의 일관된 메시기가 담겨 있다. 평등 사상과 사회 정의다. 이는 곧 미국 ‘건국 아버지’들의 정신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의 이상과 미국의 현실 사이에는 너무나 큰 괴리가 있다. 그 ‘현실’은 하루아침에 ‘지금 같이’ 되어진 것이 아니다. 300여 년 동안 백인들 주도로 구축되어 온 시스템이 굳게 다져져 있다. 그 시스템을 깨지 않고선 어떠한 변화와 변혁도 불가능한데 그는 외친다. “우리는 미국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고, 역사를 새로 쓸 수 있다”고. 과연 그의 “Yes, we can do" 가 실현될 수 있을 것인가.

    미국은 모든 것이 사람에 앞서, 확립된 시스템/메커니즘 으로 돌아가는 사회다. 그런데 그 시스템 작동의 주역들인 뷰러크래트 (bureaucrat)들, 그 절대 다수가 모든 분야에서 거의 백인들이다. 그들이 흑인 대통령의 정치 철학에 동조/협력/복종하지 않을 때 그의 꿈은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다. 그들을 설득/승복/협조케 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을 것 같다. 벌써 ‘뉴스위크’지 같은 데선 네오콘들의 ‘반 (反)자본주의 정책’ 운운하는 오바마노믹스 (Obamanomics)를 경계, 우려하는 기사가 실린다.

    그리고 미국의 대통령이자 ‘세계의 대통령’으로서 어려운 점은 또 있다.
    미국의 국익과 전 세계 인류를 위하는 것과의 상충이다. 당장 한미 간 에는 자동차 문제, 자유 무역 협정 (FTA) 문제가 대두된다.

    그리고 또 그가 부르짖는 인간 평등, 사회 정의는 미국만의 가치가 아니다. 범 세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가치다. “우리의 자유/민주, 최고의 선이고 가치이다” 라고 독단/일방적으로 밀어붙여 온 부시이즘을 벗어나, 이 새로운 가치를 어떻게 범 지구적으로 확산시킬 수 있을 것인가. Obamerica의 큰 도전이자 시련이다. <장동만>

    ://kr.blog.yahoo.com/dongman1936
    저서: ‘조국이여 하늘이여 & ‘아 , 멋진 새 한국' (e-book)

교육운동 네트워크 메타 블로그 이용방법

분류없음 2008년 11월 25일 21시 42분   by amadeus


교육운동 네트워크 홈페이지 사용방법

 

1. 특징 소개

 

먼저 우리 홈페이지의 특징을 소개합니다. 우리 홈페이지는 일반적인 홈페이지가 아니라 Web 2.0 을 따르는 메타 블로그입니다. Web 1.0시대의 홈페이지는 회원이 가입하고 로그인 해서 그곳에 글을 쓰고 자료를 저장하는 폐쇄형인 반면, 2.0시대의 홈페이지는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없으며, 회원들이 굳이 홈페이지에 들어오지 않아도 자료를 생성하고 게시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비교하면 이렇습니다.

 

웹1.0

웹2.0

정보 생산 장소

회원이 홈페이지에 로그인 하여 작성

회원들은 각자 자기 개인 홈페이지나 블로그에 작성

정보의 수집 및 게시

회원이 홈페이지 게시판이나 자료실에 등록

홈페이지가 자동으로 수집·분류하여 게시

정보의 공개 및 공유

홈페이지 경계 내부로 한정

홈페이지 경계의 의미가 없음

 

 

2. 가입하기

  자, 그럼 이미 익숙하신 분들은 그냥 사용하시면 되고, 익숙하지 않으신 분들은 이제 하나하나 따라해 봅시다. 우선 접속하면 (www.edumnet.or.kr / www.edumnet.net) 홈페이지 화면이 뜹니다. 그럼 먼저 회원가입을 선택합시다. 그러면 아래 [그림 1]같은 화면이 나타납니다. 우리 네트워크는 개방적 모임을 지향하기 때문에 개인정보를 많이 수집하지 않습니다. 그냥 닉네임과 이메일 그리고 비밀번호만으로 충분합니다. “피드를 바로 등록하고 싶습니다”부분은 지금은 그냥 두고요, 그 아래의 “이 정보로 가입합니다”를 누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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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일단 가입 신청이 된 겁니다. 그럼 공지(댓글로 알려주세요)라고 되어 있는 글을 클릭해서 댓글로 간단하게 회원님의 블로그를 소개합니다. 그러면 제가 승인합니다. 저 혼자 관리하는 관계로 며칠 걸릴수도 있으니 양해를 구합니다.

사실 회원과 비회원의 차이는 자신의 블로그를 등록할 수 있느냐 여부 외에는 사실상 없습니다.

자  어쨌든 회원 가입이 되셨습니다. 그러면 로그인을 하실수 있고요, 로그인 하실 때는 등록하신 이메일 주소와 비밀번호를 입력하시면 됩니다.

로그인을 하시면 우측 상단에 내설정관리 라는 단추가 형성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놈을 클릭합니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화면을 만나게 됩니다. 이 중 피드관리 를 클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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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드라고 하는 것은 이 홈페이지에 내용을 공급해줄 사이트를 말하는 것입니다. 대체로 블로그가 가장 적합하지만 RSS 기능을 갖고 있는 사이트면 뭐든지 다 가능합니다. 일반 유저들은 블로그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적당하겠죠.

 

3. 블로그 만들기

  자, 그러니 서두르지 말고 먼저 블로그를 만들러 갑시다.

무료로 블로그를 만들수 있는 곳은 네이버, 다음, 엠파스 등 대형 포털 사이트면 다 가능합니다. 하지만 대형 포털 사이트의 블로그들은 RSS를 완전히 구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서 제대로 수집되지 못하는 사례가 자주 발생합니다. 이글루스 같은 블로그 전문 사이트를 이용하시거나 아니면 웹 계정과 어느 정도 홈페이지 기능을 갖춘 뒤 테터툴스를 이용해서 직접 블로그를 제작하는 것을 권장합니다(텍스트큐브로 제작된 블로그는 우리 홈페이지에서 글을 수집하지 못합니다ㅠㅠ). 하지만 머리 아프고 복잡하면 그냥 평소 자주 이용하는 포털에서 블로그를 만들어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우리 홈페이지의 각 게시판이 사용하고 있는 태그는 다음과 같습니다. 글을 작성하신 뒤 분류를 희망하는 게시판에 해당되는 태그를 두개 정도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게시판 명

태그

공지

공지,알림,모임,세미나

교육이론

교육이론,교육담론,교육철학

공교육

학교,교육실천,교실,교실수업,현장

대안/소수자

대안교육,소수자교육,대안,소수자

학부모

학부모,고충,자녀교육

학생

학생,청소년,인권

철학/논술

철학,논술

진보

진보,좌파,마르크스,네그리,탈근대,생태,녹색

문화의 향기

문화,예술,여행

 

5. 피드 등록하기

  자, 이제 블로그에 대해서 웬만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몇 개의 글을 태그를 붙여서 작성해서 저장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홈페이지에 여러분 블로그의 글이 자동으로 수집되게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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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까 내설정관리-피드관리 기억나시죠? 이제 피드관리를 누르십니다. 그럼 다음과 같은 화면이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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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피드의 주소라는 칸에 여러분의 블로그의 rss 주소를 통째로 복사해서 붙여넣기 합니다. 그리고 추가하기를 선택합니다.(주의: 만약 블로그가 공개로 되어 있지 않으면 등록이 되지 않습니다). 각 블로그의 rss 주소는 통상 블로그주소/rss 인 경우가 많으나 아닌 경우도 있으므로 해당 블로그에서 확인하셔야 합니다.

한 사람이 여러 개의 블로그를 등록해도 무관합니다. 등록이 완료되면 등록된 블로그가 표시됩니다. 일단 등록되면 자동으로 수집이 되는데, 잘 안되면 새로 고침 칸의 수집하기를 눌러줍니다. 이제 모든 작업을 마치셨습니다. 앞으로 여러분이 블로그에서 새 글을 작성하고 해당되는 태그를 넣어서 저장하시면 약 30분 뒤 자동으로 우리 홈페이지 게시판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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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메타 블로그에 가입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원래 운영 방침은 누구나 자기 블로그를 등록 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만, 안타깝게도 상업성 스팸 블로그가 자꾸 등록되어서 관리자 확인 후 승인하는 것으로 방침을 바꾸었습니다.

블로그를 여기에 등록하지 않을 경우에는 회원으로 가입하나 안하나 아무 차이가 없으며, 블로그를 여기에 등록하시고 싶으시면 회원 가입 신청을 한 뒤, 여기에 댓글로 간단한 블로그 소개를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계속 희망과 진보를 꿈꾸는 귀하의 행보가 활기차게 이어지기를 기원하며, 건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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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되기곰 2008년 11월 26일 09시 43분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가입 신청합니다..

  2. 2008년 12월 14일 05시 38분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 BlogIcon amadeus 2008년 12월 14일 21시 18분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렇게 무명의 블로거로 지내고 있습니다. 이제는 나름 파워블로거로 업그레이드 되어가는 중입니다. 이번 금성교과서 사건 때문에 빡 돌아서 내년에는 아예 좌편향교과서를 써보려고 준비하고 있는 중입니다.

  3. 2008년 12월 20일 20시 45분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자축] 10만 히트 돌파!

알립니다 2008년 11월 05일 08시 29분   by amadeus
2008년 5월에 수줍게 문을 연, 교육운동네트워크의 메타블로그가 불과 5개월만에 10만 히트를 돌파했습니다. 하루 평균 700명 이상이 우리 메타블로그를 방문하셨다는 것인데, 무척 고무적입니다.

다만 실제 조회율이 너무 낮아서 조금 실망스럽기도 합니다. 방문하시는 여러분들은 부디 이곳에 수집되는 좋은 블로그 글들을 좀 더 많이 클릭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통계 보기


지금까지 총 방문자 수 100,705
오늘 방문자 수 637
어제 방문자 수 1,537
이번주 방문자 수 6,127
총 방문자 수 초기화
내 날개 운영 상황
지금까지 수집된 글 949개
등록된 회원 수 28명
등록된 피드 수 26개
최근 업데이트 2008-11-05 08:22:07
주간 방문자
 
이번주 2004 1949 1537 637 - - -
지난주 949 823 767 593 846 1230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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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 교육의 본질과 역할

1. 교육의 정의에 대한 비판적 고찰


뒤르켐은 우선 교육에 대한 기존의 정의를 비판적으로 고찰하면서 논문을 시작한다.
 
밀은 교육을 "우리 본성을 완전하게 만들 목적으로 취하는 모든 행동"으로 정의했다. 뒤르켐은 이 정의는 너무 넓고, 심지어 타인이 우리에게 주는 영향이라면 뭐든지 교육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혼란을 야기한다고 비판한다.
칸트는 "각 객인의 목적을 가능한 한 완전하게 개발하는 것, 즉, 인간의 모든 능력을 조화롭게 계발하는 것"을 교육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뒤르켐은 이는 사회분업을 무시한 개인주의적 관점이라고 비판한다. 현대사회는 고도로 분업화되어 있으며, 모든 인간이 모든 능력을 계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래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분업화된 사회에서는 특정 분야에만 정통해도 되며,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공통적 기반을 상실한다고 볼수 없다.

그 외에 공리주의와 스펜서도 비판적으로 검토한 뒤 뒤르켐은 선배들의 공통의 결함이 이상적이고 완전한 교육의 실체를 가정한 데 있다고 결론내린다. 즉 모두에게 타당한 보편적인 교육의 상 같은 것이 있을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훌륭한 교육이 로마시대에는 나라 망칠 교육이며, 반대로 고대의 위대한 교육은 오늘날 전체주의 교육으로 질타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교육은 역사적으로 부단히 변화할수 밖에 없으며, 그 중 하나만 완전하고 나머지는 다 오류라고 볼수 없는 것이다. 교육은 이상이 아니라 제도이며, 따라서 사회구조의 반영이다. 따라서 각 시대마다 그 시대와 사회에 가장 적합한 교육제도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마치 논리적으로 구상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면 앞서와 같은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 정당, 정치기구, 과학의 발달수준, 산업발달수준과 교육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이것과 분리되면 교육체제는 이해불가능하다. 따라서 교육의 정의를 내리기 위해서는 이 체제와 제도를 역사적으로 고찰해야 한다. 이런 연구 결과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불변하는 몇몇 요소들을 추출할수 있으며, 이를 통해 교육의 예비적 개념을 정립해서 이론적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

2. 교육의 정의


역사적 고찰의 결과 뒤르켐은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찾는다.
1)교육은 세대간에 이루어진다. 2)교육은 성인이 아동, 청소년 세대에게 영향을 주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이 영향이 어떤 종류이며, 어떤 식으로 주어지는가가 바로 그 사회의 성격과 연결된다.
또한 역사적 경향 속에서 뒤르켐은 교육이 점점 다양화 전문화 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심지어 완전평등사회라도 직업의 분화가 교육의 다양성을 초래한다. 절대적인 동등성, 동등한 교육은 선사시대에나 가능한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교육은 각 사회분업에 적합한 영역별 전문교육의 분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그러나 전문교육들에도 공통의 기반이 있다. 그것은 계층 직업을 불문하고 가르쳐야할 공통의 사상, 정서, 관습이다. 모든 사회는 그 나름의 이상적인 인간상과 의무를 지덕체 측면에서 설정하기 마련이며, 이것은 특히 종교가 기반을 상실한 근대사회에서는 결정적인 사회통합 기제다.

따라서 모든 시대를 막론하고, 교육의 기능은
1) 사회가 구성원에세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신체, 정신적 제 기능의 육성과 계발, 2)특정 사회집단(분업에 의한)에서 공통적인 여러 기능의 계발(전문교육)  이 두가지다.

이 둘은 사회의 역동을 보여주는데, 사회는 어느정도 동질성을 가져야 유지된다. 그러나 다양성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사회통합과 분업, 이 둘은 모두 중요한 과제며, 이는 교육에도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다. 마치 한국교육과정의 국민공통과정과 전문심화과정과도 같이.

이리하여 뒤르켐은 교육을 정의하기를 "교육은 아직 사회생활의 준비가 되지 않은 어린 세대들에 대한 영향력 행사로, 그 목적은 전체 사회로서의 정치사회와 그가 종사해야 할 특수환경 양편에서 요구하는 지덕체 특성의 육성과 계발이다."

3. 정의의 적용: 교육의 사회적 성격


교육은 어린세대 사회화를 위한 여러 방법으로 구성되는데, 바로 이들을 개인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로 형성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사회적 존재는 인간이 타고나는 소질이 아니며, 자연적으로 발달되지 않는다. 따라서 사회는 새 세대가 등장할때마다 자신을 새겨넣어야 할 백지에 직면한다. 교육은 타고난 소질을 계발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새로운 존재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생활은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과학적, 성찰적 사고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속에서 기능수행이 어려워진다. 따라서 과학 학습이 의무로 요구된다.마찬가지로 문화, 체육 조차도 이런 사회에서의 기능수행을 위해 요구되며, 따라서 교육된다.

그렇다면 개인을 사회라는 폭군의 압제에 적응시키는 것이 교육인가? 아니다. 인간은 사회 안에 살기 때문에 인간이다. 도덕은 개인의 실천이성이 아니라 공동생활에서 연유되는 것이며, 지식 역시 사회적으로 형성된 기본개념, 방법론 등에 의존한다. 만약 사회에서 얻은 것을 제거한다면 인간은 동물이 되고 만들것이다. 따라서 교육은 억압이 아니라 도리어 개체를 성장하도록 도와주고 참인간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4. 교육과 국가의 역할

따라서 교육은 가정의 소관사항이 아니다. 교육은 사적과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가는 교육에서 소극적 행위자일수 없다. 교육의 방향을 지시하는 근거다. 아동이 사회에 적응하도록 부과될 사고, 정서의 내용을 교사에게 제공, 상기시켜 주는 것은 국가의 임무다. 만약 교육적 영향의 사회적인 방법의 시행을 보증하지 못한다면, 교육은 사적 신념의 시녀가 되고 말며, 이는 교육의 기본목적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국가의 수업독점을 의미하지 않는다. 학문의 진보는 개인의 창의가 허용되어야 빠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육의 다양성은 보장하데, 그 면허권은 국가가 가지고 있어야 한다. 즉 국가는 까다롭고 신중하게 교육에 관여한다.

따라서 사상, 감정의 공동체를 국가가 억지로 만드는 것은 불가하다. 국가는 다양한 의견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 기저에 있는 공통성 즉, 이성의 존중, 과학의 존중, 민주적 도덕의 기초를 이루는 사상과 감정의 존중 등을 바탕으로 교육의 대강을 규정하고, 그것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을 역할로 삼아야 한다. 국가의 영향력은 덜 공격적이고, 한계내에서 현명하게 행사해야 실질적인 효력을 볼 것이다.

5. 교육력과 교육방법


개인은 어느정도의 기질적 차이는 타고난다. 그러나 그것을 구체적인 결과로 만드는 것은 교육의 영향력이다. 같은 공격적 기질을 타고난 아동도 교육의 결과에 따라 범죄자가 될수도 개혁가가 될수도 있다. 즉 소질과 사회적인 역할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으며, 이 거리를 교육이 아동에게 인도해 주어야 한다.

이를 위한 적절한 수단은 교사와 아동의 관계에서 찾아야 한다. 아동은 암시받기 쉬운 자연스러운 수동성의 상태에 있으며, 교사는 우월한 위치에서 아동에게 힘을 미칠수 있다. 교사나 부모의 모든 행위나 사태는 반드시 아동에게 어떤 흔적을 남기며, 순간순간의 수많은 무의식적 영향을 남긴다.

따라서 교육은 즉각, 순간적, 분명한 성공을 추구하거나 여기 따라 일희일비하면 안되며, 일관성을 갖고 꾸준히 계속되어야 한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교사의 권위다. 교사의 권위는 아동의 수용성에 작용하는 우월한 힘(교육력)의 가장 중요한 근원이다. 교사는 아동이 장차 살아가야 할 사회에서 직면할 의지, 의무의 화신이라야 한다. 따라서 교사의 권위는 순전히 도덕적 우월에서 비롯된 것이라야 한다.
이 도덕적 권위는 교사가 의지력을 가지고, 자신의 기능과 직무에 대해 존경심을 가지고 있을때 비로소 구성된다. 따라서 교사의 권위는 자유와 배타적이지 않다. 교사의 권위는 의무와 이성이 가진 권위의 한 측면이다. 아동은 이런 권위의 우월성에 복종하도록 훈련받아야 하며, 그래야 장차 양심적으로 발견한 권위도 존중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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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amadeus 2008년 10월 15일 21시 10분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뒤르켐은 교육학에서 보수적인 입장을 대변한다고 볼수 있습니다. 혹은 자유주의에 맞서 공동체주의적 입장을 대변할수도 있습니다. 지난번에 보았던 칸트는 개인주의, 자유주의적 교육론의 정수를 보여주었는데, 여기에 대해 뒤르켐은 대단히 예리한 비판을 가하고, 공동체주의에 기반한 "공교육"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오늘날 공교육제도의 기반의 상당부분이 뒤르켐에게 빚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뒤르켐의 교육학을 이해하고, 또 제대로 극복해낼때 새로운 교육학의 전기도 마련될 것입니다.

    사실 개인으로서 완성이냐 시민으로서 완성이냐 하는 문제는 교육의 천년간의 난제였습니다. 사실 당연히 교육은 시민(혹은 신민)으로서 아동을 완성시키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왔지만, 여기에 반기를 들고 아동의 "자유"를 역설한 사람이 루소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사회계약"이 가능하려면 그럴 수준에 이른 공동체적 사유를 할수 있는 "시민"이 필요한데, 이 시민은 저절로 "자연에 의해" 길러지지 않는다는 것이 루소의 난점이었습니다. 칸트는 이 난점을 인간은 모두 "완성된 이성" 즉, 범주와 실천이성(양심)을 장착하고 태어난다고 주장함으로써, 즉 개인의 자유가 최대한 신장된다고 해서 개판되지 않는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유주의>공동체주의 를 주장하였는데, 뒤르켐은 거꾸로 개인을 사회에 적응시킨다고 해서 자유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하 자세한 내용을 댓글, 혹은 트랙백으로 논의하고, 또 다른 발제문이나 감상문이 있으시면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공지] 교육철학 다음 세미나

교육철학 세미나 2008년 09월 27일 12시 47분   by amadeus
교육철학 다음 세미나는 에밀 뒤르켐 "교욱과 사회학" 배영사 입니다.
칸트의 교육철학이 자유주의적인 교육학의 전형을 보여준다면, 뒤르켐의 교육사회학은 공동체주의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제도와 목적상의 공동체 주의와 그 운영상의 자유주의가 바로 근대 공교육의 기괴한 접점이라고 볼때 이 두 관점의 꼼꼼한 비교가 필요합니다.

다 읽을 필요는 없고, 1부와 2부만 읽도록 하겠습니다.

다 읽으신 분은 자유로이 이 곳에 발제문을 올려주시고, 거기에 대해 서로 댓글이나 트랙백을 주고 받으면 되겠습니다. 지난 번에는 저 혼자 좀 뻘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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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khj4435 2008년 10월 06일 14시 22분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날짜를 박으셈~ 이 날 올려라~ 하는. 단, 주말 빼고요. 요즘 주말마다 여행을 다녀요~ ^^

  2. BlogIcon amadeus 2008년 10월 07일 08시 56분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0월 13일~10월 18일 사이에 올리삼.
    논의는 그 다음주부터 무기한으로 진행합시다.

  3. BlogIcon khj4435 2008년 10월 07일 18시 46분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케~

  4. BlogIcon khj4435 2008년 11월 07일 10시 53분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날짜 정하라고 한 말이 무색하게 잠수 탔다는...;; 어머님이 걍 아프세요.담주 퇴원을 할 수 있을라나 에효~ 당분간은 뭘 하는게 어려울듯하네요. 암튼 그래도 들려 읽기라도 할게요; 갠적으론 칸트보단 뒤르켐의 책이 매력있었습니다. 언제나 좋은 글 감사~

칸트의 교육학 강의 발제(2)

교육철학 세미나 2008년 09월 21일 20시 56분   by amadeus
<본론>


이제 본론이다. 그런데 서론에서 이미 개요를 다 이야기 했기 때문에 정작 본론에서는 새로운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 않는다. 칸트는 나름 교육의 각 단계, 즉 양육, 훈육, 지식교수, 도덕교육에 해당되는 구체적인 사례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 대부분은 좀 시대에 맞지 않고, 때로는 이 책의 품위(?)와도 맞지 않는다. 특히 양육에 관한 부분이 그렇다. 그러나 그렇게 구체적인 부분들(이를테면 아기에게 무엇을 먹이고, 옷은 어떻게 입히고 등등)까지 세심하게 연구하고, 그 바탕 위에 교육학을 세우려 한 칸트의 자세를 배우자면 배워야 할 것이다.

본론에서 칸트는 교육과 교육이론이 자연적일수도 있고, 실천적일수도 있다고 한다. 여기서 자연적인 교육은 인간이 동물과 공유한 것과 관계하고, 실천적인 부분이 바로 인간이 인격적 존재가 될수 있는 교육이다.

칸트는 지난 발제에도 나왔듯이 이 실천적 교육을 다시 세 단계로 나눈다.

1) 문화화 하는 교육(지식교육): 시민사회에서 자리를 잡고 또 여기에 영향력을 끼치고 이용할 수 있는 여러가지 능력을 계발하고, 여기에 숙달, 숙련되게 함. 다소 기계적인 방식으로 수행되며 주요 무대는 학교. 실제 우리나라 학교에서 행해지는 대부분의 교육과정은 아직도 이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2) 문명화 하는 교육(사회교육): 사회생활에 필요한 여러가지 실용적인 능력, 분별력, 예절 등을 익혀서 자신을 공동체에 적응시킬수 있는 능력을 키움. 이것은 일종의 사교와 관련된, 그리고 각종 의례 등과 관련된 교육으로 시민사회가 주된 교육의 장소가 된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종류의 교육은 어디에서도 하고 있지 않다. 칸트는 지식과 도덕의 중간단계로 이 문명화 교육을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

3)도덕교육: 학생들의 도덕성, 품성과 성격을 함양하여 인류공동체 속에서 제자리를 찾게 하는 교육이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자유로이 행위하는 존재가 된다.

그런데 칸트는 이런 실천적 교육이 어린이의 발달단계에 맞도록 순차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훈육이 이루어져야 할 시기에 숙련이나 실용적 분별이 먼저 깨친 어린이는 교활한 아이가 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자연적교육으로서 양육과 훈육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는데, 이는 건너 뛰어도 무방하다.

그리고 나서 실천적 교육의 구체적인 사례와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 중 첫단계가 여러 능력들을 기르고 키우는 교육인데, 그 중에서 특히 마음의 능력들, 정신의 능력들을 키우는 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어떤 체계적인 학습이론을 기대하기는 어려운데, 이는 그의 제자인 헤르바르트에 가서야 완성되는 부분이다. 다만 몇 가지 경구적인 충고들은 귀담아 들을만하다.

70절, 인간에게 가장 좋은 휴식은 일을 한 뒤 향유할 수 있는 휴식이다. 따라서 아이들을 일하는 것에 습관적으로 익숙해지도록 해야 한다.  아동교육은 일정한 규제와 강제, 즉 외부로부터의 의무를 함축하고 있는 방법에 따라 이루어져야 하지만, 비열한 노예근성이 나오게 해서는 안된다.

71절, 아동의 마음의 능력은 마음의 높은 능력들을 주로 고려하여 키워야 한다. 즉 기지와 재기는 지성의 능력을 고려하여 길러야 한다. 어떤 한 능력만 따로 길러서는 안되며, 다른 마음 능력들과 관계지워서 키워야 한다.

칸트는 저차 능력으로 기억력, 기지, 재치, 상상력 등을 들고 있으며, 고차능력으로 지성(일반적 원리 인식하는 능력), 판단력(이를 개별 사례에 적용할 수 있는 능력), 이성(여러 일반적 원리들의 연결을 통찰하는 능력)을 들고 있다. 따라서 단순한 기억, 단지 상상은 의미가 없다.

결국 칸트가 제안하는 교수방법은 지성을 중심으로 다양한 영역의 능력들이 유기적으로 발휘되는 통합적인 교수다. 물론 이는 기계적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학생들이 지성의 규칙을 사용하고 있음을 자각하는 속에 이루어져야 한다. 즉 지성의 규칙은 그 사용과 그 습득이 같은 과정이라야 한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칸트는 교육의 목적에 대한 체계적 개념화 뿐 아니라(이는 주로 서론에서 완결됨), 그 목적을 성취하는 방법에 대한 체계적 개념도 제시해야 한다고 말한다.(본론이 이것을 다루고는 있으나 미진함).

우선 지식(마음의 능력 기르는 교육)교육에 대한 방법론은 통합교수로 귀결되었고, 칸트는 다음으로 도뎍교육의 방법론으로 이행한다. 여기서 그는 습관이 아니라 자기의 행위규칙에서 말미암아 선핸행위를 수행해야 한다는 그의 대표작인 "윤리형이상학의 정초"의 근본 원리를 재확인한다. 즉, 자기가 해야 할 행위의 정당한 이류를 알고, 이를 도덕적 의무 개념에서 추론, 정당화 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선과 악의 행위 규칙에 따라 추론하여 행위할수 있을때 훈육과 구별되는 도덕교육이 성립되며, 이는 그의 앞서 도식에 따라 교육의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목적이다.

따라서 그는 상벌에 의존하는 교육을 도덕교육을 훈육 수준으로 격하시킨다고 보아 거부한다. 아이가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주어 버릇을 망쳐서도, 혹은 의도적으로 거절하여 노예근성을 배게 해서도 안된다. 그 바탕에서는 항상 일관된 원칙이 있어야 하며, 정당한 행위규칙의 정당성을 아동이 통찰할수 있도록 해야한다.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부모와 교사가 가장 조심해야 할 원칙이 도출되는데 그것은 바로 보편성이다. 부모와 교사는 자신의 경향성,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항상 보편적 원리 아래 스스로를 정당화하면서 아동들을 대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칸트는 하나의 난제를 남겨 두는데, 이러한 도덕교육이 어릴때부터 이루어져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훈육이 완료된 다음에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해 스스로 혼란스러워한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어릴때도 처벌, 상이 아니라 원리를 깨닫고 받아들이면서 운운하지만, 또 다른 경우에는 아동의 복종은 청소년의 복종과 다른데, 청소년은 의무에서 비롯된 복종을 한다고 진술했기 때문이다.

이는 루소의 잔영으로 보인다. 그래서 훈육기 아동의 처벌을 인위적인 강제, 무력으로 보지는 않는다. 자연적인 결과가 가장 훌륭한 처벌이라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도덕적인 경멸과 수치감이 발전된 처벌이 되며, 마지막으로 의무가 등장한다.

그 외에도 잡다할 정도로 많은 제안들이 있지만, 일일히 고려할만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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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amadeus 2008년 09월 21일 21시 24분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7일부터 댓글과 트랙백(블로그 있으신 분들은 이걸 강추)으로 토론을 진행해 봅시다. 내용에 대한 질문이나 딴지도 좋고, 한국 교육과 관련한 문제의식도 좋습니다.

    그리고 10월 25일에는 뒤르켐의 "교육과 사회학"을 읽고 토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주 얇고 간결하며, 중복되는 내용이 많아서 쉽게 읽을수 있습니다.

  2. BlogIcon khj4435 2008년 10월 06일 14시 18분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발달 단계 이야기가 나오면 늘 나오는 질문이 있죠. 개인차는 어쩌란 말이냐~!! 그리하여 수준별, 개별화 교육이야기가 나오죠. 솔직히 전 부진아들을 거의 무시하는 교사죠. 3시간 영어 단어를 외워도 30분이면 머리속이 비어지는 녀석들. 수업 중에 이 아이들을 배려해서 잘 참여시키고 따로 이들을 위한 수업자료를 만드는 거~ 전 쥐약입니다. 다들 책을 너무 안 읽고 공부를 안한다고 한탄합니다. 하지만 가끔 생각합니다. 꼭 이 망할 책밖엔 없는 거냐고. 고차 능력인 지식만이 살길이냐고.

    • BlogIcon amadeus 2008년 10월 07일 09시 58분  댓글주소  수정/삭제

      개인차의 범위가 어느정도 되는지, 과연 각 개인별로 모두 유의한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서 오늘날 심리학의 결과는 아니라고 하고 있죠. 그것은 능력의 차이가 아니라 경험의 차이이며, 삶의 방식의 차이고, 그 차이는 마냥 강조될 것이 아니라 그속에서 공통의 것을 찾아가야 하는 소재인 것이죠.

칸트의 교육학 강의 발제(1)

교육철학 세미나 2008년 09월 15일 21시 33분   by amadeus



우선 이 책의 의미부터 살펴보자. 주지의 사실이지만 근대 교육학의 효시는 코메니우스지만, 그 속에서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갈등을 간파하고 그 화해를 꾀한 최초의 종합자는 루소다. 루소는 "개인적 자유를 신장하는 교육방법"을 통해 "공동체의 시민을 양성하는" 모순적 목표를 놓고 골몰했다. 그리고 그의 결론은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 속에 개인적 자유의 교육, 즉 인간으로서 완성되는 교육이 곧 공동체 구성원, 즉 시민으로서 완성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그의 교육은 도리어 잘못된 공동체와 그 문화로부터 아동의 자연스러운 성장을 보호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이를 자연주의 교육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루소의 교육방법은 큰 문제에 봉착했는데, 그것은 1:1 교육이며 10여년을 함께 지내는 멘토에 의한 교육이라는 것이다. 이래서는 현실적인 적용이 어렵다. 루소의 영향력을 크게 받은 손꼽히는 두 사람, 루소의 두 제자라고 불리는(실상 루소는 아무도 가르치지 않았던) 페스탈로치와 칸트는 공히 이 문제를 놓고 고민했다.

두 사람은 거의 같은 결론에 도달했는데, 한 번에 여러명을 모아놓고 하는 공식적인 교육을 통해서도 루소가 꾀했던 인간으로서 완성됨으로써 시민으로서 완성되는 그런 교육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페스탈로치는 이를 실천으로, 그리고 그가 세운 위페르돈 학교로, 또 그의 영향을 받은 데싸우 학교로 보여주었고, 칸트는 이를 이론적으로 정당화 했다(비록 둘은 만난 적 없지만). 바로 이것이 이책을 읽는 이유다. 근대 공교육의 시작점에서 최초로 그 내적 모순과 긴장을 통합하려한 이론적인 시도라는 것이다. (루소의 에밀은 소설 형식이고, 페스탈로치의 저작은 죄다 수기 형식이라....)

그런데 이 책의 특징은 방대한 서론에 있다. 사실상 서론에서 할 말을 다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바쁜 사람은 서론만 제대로 이해해도 충분하다. 본론에 나오는 각종 상세한 각론들은 사실상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낡거나 틀린것이 많다.

칸트는 루소의 두 가지 교육목표에 대한 고민을 순차적으로 진행하는 다른 방식의 교육 및 교육기관을 제시함으로써 넘어서고 있다. 즉, 자연적인 교육/ 실천적인 교육, 사교육/ 공교육이 그것이다. 그런데 칸트는 같은 책에서 교육에 대한 분류를 매우 다양한 차원에서 시도하여 혼동을 일으킨다. 이건 차차 살펴보기로 하자.

<서론>


서론에서 제일 먼저 분류한 교육은 양육, 훈육, 교수다.

1. 양육은 자신의 능력을 해가되지 않게 쓰도록 보살피는 것으로 유아기때 행해진다.

2. 훈육은 기율과 규율을 익힘으로써 본능을 억제하는 훈련을 함으로써 장차 스스로 이성적 판단에 의해 본능을 조절할 준비를 갖추는 것으로 아동기에 행해진다. 훈육을 받음으로써 인간은 동물적 본성과 충동의 지배 받지 않고 인간성을 지킬수 있다. 그러나 훈육 단계에서 아동은 어떤 행동을 해야하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알게되지만, 왜 그래야 하는지를 법칙에 의거해 인식하지는 못한다. 이렇게 양육과 훈육은 주로 억제하는 것으로서 소극적 교육이라고 분류되기도 한다.

그런데 다시 칸트는 양육/교육 의 분류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 경우 교육에는 훈육과 교수가 포함된다.

3 교수는 다시 지식교육과 도덕교육으로 나뉜다. 여기에서 칸트는 교육의 목적에 대해 명백하게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개인뿐 아니라 인류의 완전성을 고취하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서는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받은 소명에 대한 개념적 지식을 갖추어야 하며(지식교육), 선으로 향하고자 하는 성향을 계발해야 한다(도덕교육).
 
칸트는 교육이란 바로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일종의 기예라고 정의하고 있다. 즉 인간의 본성을 충분히 성취시키는 방향으로 타고난 소질을 계발하는 기예다. 따라서 이는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방식의 모방학습으로는 불가하며 반드시 의도적인 탐구, 연구의 양상으로 발전되어야 한다. 따라서 교육은 당장 투입된 예산의 효과에 대한 당장의 결과를 확인하기 곤란한 영역이므로 국가가 직접 관여하거나, 부모에게 마냥 맡길 것이 아니라 의식이 충분히 계몽된 전문가의 판단에 따라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성이 실현되고 완성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여기에서 칸트는 교육의 일반적인 네가지 목표를 상세히 제시힌다.

1) 야만성, 동물성을 버리고 충동을 억제할 수 있어야 한다(훈육이 담당)
2) 문화화 되어야 한다. 즉 신체와 마음의 능력을 기르고 키워야 한다.
3) 문명화 되어야 한다. 즉, 처세, 사교술, 실용적 분별력, 사회생활 요령등이 있어야 한다.
4) 도덕화되어야 한다. 즉 보편적인 선을 선택할 수 있는 마음씨를 길러야 한다.

1)의 결과 아동은 한 개인으로 완성되며, 2),3)의 결과 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 완성되며, 4)의 결과 인류사회의 구성원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각 연령별로 잘 배분되면, 루소가 고민한 한 인간으로서의 완성과 시민으로서의 완성은 동의어가 된다. 그러나 현재 교육은 2),3)에 너무 치중하여 4)가 너무 등한시되고 있다는 탄식도 빼놓지 않는다.

한국의 경우는 어떨까? 이 네가지중 하나도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물론 이는 모든 인간이 보편적인 실천이성, 즉 선험적인 도덕법칙을 가지고 있다는 칸트의 윤리학이 지탱될 때의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이런 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교육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