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교육학 강의 발제(1)

교육철학 세미나 2008년 09월 15일 21시 33분   by amadeus



우선 이 책의 의미부터 살펴보자. 주지의 사실이지만 근대 교육학의 효시는 코메니우스지만, 그 속에서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갈등을 간파하고 그 화해를 꾀한 최초의 종합자는 루소다. 루소는 "개인적 자유를 신장하는 교육방법"을 통해 "공동체의 시민을 양성하는" 모순적 목표를 놓고 골몰했다. 그리고 그의 결론은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 속에 개인적 자유의 교육, 즉 인간으로서 완성되는 교육이 곧 공동체 구성원, 즉 시민으로서 완성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그의 교육은 도리어 잘못된 공동체와 그 문화로부터 아동의 자연스러운 성장을 보호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이를 자연주의 교육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루소의 교육방법은 큰 문제에 봉착했는데, 그것은 1:1 교육이며 10여년을 함께 지내는 멘토에 의한 교육이라는 것이다. 이래서는 현실적인 적용이 어렵다. 루소의 영향력을 크게 받은 손꼽히는 두 사람, 루소의 두 제자라고 불리는(실상 루소는 아무도 가르치지 않았던) 페스탈로치와 칸트는 공히 이 문제를 놓고 고민했다.

두 사람은 거의 같은 결론에 도달했는데, 한 번에 여러명을 모아놓고 하는 공식적인 교육을 통해서도 루소가 꾀했던 인간으로서 완성됨으로써 시민으로서 완성되는 그런 교육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페스탈로치는 이를 실천으로, 그리고 그가 세운 위페르돈 학교로, 또 그의 영향을 받은 데싸우 학교로 보여주었고, 칸트는 이를 이론적으로 정당화 했다(비록 둘은 만난 적 없지만). 바로 이것이 이책을 읽는 이유다. 근대 공교육의 시작점에서 최초로 그 내적 모순과 긴장을 통합하려한 이론적인 시도라는 것이다. (루소의 에밀은 소설 형식이고, 페스탈로치의 저작은 죄다 수기 형식이라....)

그런데 이 책의 특징은 방대한 서론에 있다. 사실상 서론에서 할 말을 다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바쁜 사람은 서론만 제대로 이해해도 충분하다. 본론에 나오는 각종 상세한 각론들은 사실상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낡거나 틀린것이 많다.

칸트는 루소의 두 가지 교육목표에 대한 고민을 순차적으로 진행하는 다른 방식의 교육 및 교육기관을 제시함으로써 넘어서고 있다. 즉, 자연적인 교육/ 실천적인 교육, 사교육/ 공교육이 그것이다. 그런데 칸트는 같은 책에서 교육에 대한 분류를 매우 다양한 차원에서 시도하여 혼동을 일으킨다. 이건 차차 살펴보기로 하자.

<서론>


서론에서 제일 먼저 분류한 교육은 양육, 훈육, 교수다.

1. 양육은 자신의 능력을 해가되지 않게 쓰도록 보살피는 것으로 유아기때 행해진다.

2. 훈육은 기율과 규율을 익힘으로써 본능을 억제하는 훈련을 함으로써 장차 스스로 이성적 판단에 의해 본능을 조절할 준비를 갖추는 것으로 아동기에 행해진다. 훈육을 받음으로써 인간은 동물적 본성과 충동의 지배 받지 않고 인간성을 지킬수 있다. 그러나 훈육 단계에서 아동은 어떤 행동을 해야하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알게되지만, 왜 그래야 하는지를 법칙에 의거해 인식하지는 못한다. 이렇게 양육과 훈육은 주로 억제하는 것으로서 소극적 교육이라고 분류되기도 한다.

그런데 다시 칸트는 양육/교육 의 분류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 경우 교육에는 훈육과 교수가 포함된다.

3 교수는 다시 지식교육과 도덕교육으로 나뉜다. 여기에서 칸트는 교육의 목적에 대해 명백하게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개인뿐 아니라 인류의 완전성을 고취하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서는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받은 소명에 대한 개념적 지식을 갖추어야 하며(지식교육), 선으로 향하고자 하는 성향을 계발해야 한다(도덕교육).
 
칸트는 교육이란 바로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일종의 기예라고 정의하고 있다. 즉 인간의 본성을 충분히 성취시키는 방향으로 타고난 소질을 계발하는 기예다. 따라서 이는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방식의 모방학습으로는 불가하며 반드시 의도적인 탐구, 연구의 양상으로 발전되어야 한다. 따라서 교육은 당장 투입된 예산의 효과에 대한 당장의 결과를 확인하기 곤란한 영역이므로 국가가 직접 관여하거나, 부모에게 마냥 맡길 것이 아니라 의식이 충분히 계몽된 전문가의 판단에 따라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성이 실현되고 완성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여기에서 칸트는 교육의 일반적인 네가지 목표를 상세히 제시힌다.

1) 야만성, 동물성을 버리고 충동을 억제할 수 있어야 한다(훈육이 담당)
2) 문화화 되어야 한다. 즉 신체와 마음의 능력을 기르고 키워야 한다.
3) 문명화 되어야 한다. 즉, 처세, 사교술, 실용적 분별력, 사회생활 요령등이 있어야 한다.
4) 도덕화되어야 한다. 즉 보편적인 선을 선택할 수 있는 마음씨를 길러야 한다.

1)의 결과 아동은 한 개인으로 완성되며, 2),3)의 결과 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 완성되며, 4)의 결과 인류사회의 구성원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각 연령별로 잘 배분되면, 루소가 고민한 한 인간으로서의 완성과 시민으로서의 완성은 동의어가 된다. 그러나 현재 교육은 2),3)에 너무 치중하여 4)가 너무 등한시되고 있다는 탄식도 빼놓지 않는다.

한국의 경우는 어떨까? 이 네가지중 하나도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물론 이는 모든 인간이 보편적인 실천이성, 즉 선험적인 도덕법칙을 가지고 있다는 칸트의 윤리학이 지탱될 때의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이런 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교육방법의 측면에서 칸트는 이루어지는 장소에 따라 사교육/공교육, 그리고 주로 사용되는 방법에 따라 기계적 규제와 도덕적 규제로 나눈다. 사교육은 우리나라에서 쓰는 의미와 달리 가정교육, 기타 면식관계에 의해 이루어지는 교육을 말한다. 공교육은 공적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교육인데, 칸트는 공교육기관인 학교를 지식교수활동과 도덕교육활동의 기관으로 못박고 있다. 즉 훈육의 단계까지 마친 아동을 가정으로부터 인수받아 시민과 인류로 완성시키는 곳이 학교인 것이다. 이때 칸트는 공교육이 사교육보다 보편타당성의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더 우월한 방법으로 보고 있다. 사교육은 한 가정 안에서 발생한 오류와 실수가 계속 세대를 통해 이어질수 있기 때문이다.

기계적 규제는 아동들이 반복에 의해 습관화되어 따르게 만드는 방식이다. 즉 순종과 복종에 의해 행동한다. 도덕적 교제는 아동들이 일정한 행위법칙에 따라 자유를 향유하는 것이다. 똑 같이 규칙을 따르더라도 전자는 따르도록 지시되어 있으니까 따르며, 후자의 경우는 그것이 타당함을 알기 때문에 따르는 것이다. 이는 선의지를 결국 실천이성의 명령으로 본 주지적인 칸트의 윤리학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칸트는 자신의 윤리학에서 직면한 딜레마와 다시 만나게 된다. 그것은 행위규칙, 행위법칙이 가하는 규제와 구속을 자유의 능력과 어떻게 조화시킬것인가 하는 것이다. 결론은 그의 윤리학과 마찬가지로 규제와 구속을 받아들이지만 그것을 어디까지나 자유의지에 의해 스스로 복종함으로써 받아들여야 한다. 칸트는 이것을 자유와 규율의 합성어인 자율로 부르고 있다. 교육에서 이것은 어떻게 나타날까? 학생들이 규제와 구속에 익숙해야 하면서도 동시에 자기 자유를 올바르게 사용, 향유할수 있도록 지도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개판과 기계적 복종 사이에 길이 있는 것이다.

물론 칸트는 이 모순적 목표가 동시에 달성된다고 보지 않았다. 앞에서 보았지만, 가정과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에서 충분히 훈육된 다음(규제, 구속이 우선), 10세 이후부터 그 규제 구속의 이유를 이성적으로 추론하는 교육이 이루어짐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이를 칸트는 어릴때부터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면 반드시 타인의 저항에 부딪침에 익숙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좀 더 나이를 먹으면 모든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기에 서로 상대의 저항이 될 수 있음을 터득하고, 타인의 목적 성취를 허용할때 자신의 목적도 성취할 수 있음을 터득하도록 하라고 제안하고 있다. 그리하여 자신의 자유를 사용하는 방법을 익히게 될때, 이것이 인격교육이라고 불리게 된다.

그런데, 어릴때 타인의 저항을 경험하지 못한 귀족, 왕족 자제들은 결국 훈육이 제대로 되지 못해 이후 교육도 잘 안되어, 나이를 먹어도 어린아이나 마찬가지라고 개탄한다. 바로 이 점에서 칸트는 공교육을 강조한다. 신분귀천 무관하게 보편적인 훈육과 교육을 받아야 이런 폐단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여러 아동들이 공동생활을 함으로써 저절로 타인의 저항, 제한을 경험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자유를 사용하는 법을 익힐수 있으니, 미래 시민을 기르는 가장 모범적인 교육방식이라는 것이다. 이게 뭔소리인가 하겠지만, 당시에는 "학교"라는 교육기관이 상당히 실험적인 모델이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그런데, 18세기 칸트의 눈에도 한국의 교육은 낙후되고, 목적이 전치된 타락한 모습일테니 참으로 한심한 상황이 아닐수 없다. 칸트가 제시한 목표 네가지중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고, 기계적 방식만 행해지며, 도덕적 규제는 언감생심인 상황. 학부모들이 자기 자녀를 인류의 구성원은 커녕 한국의 구성원으로도 생각안하는 지독한 이기주의. 즉 칸트의 말을 빌리면 아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나이만 먹은 어른들이 다시 자기 아이를 키우는 상황인 것이다. 이런 가정의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 모든 권위가 이양된 공교육을 제안한 것인데, 저 아동같은 학부모가 여전히 입김을 수요자란 이름으로 가하고 있으니, 칸트가 보면 경을 칠 노릇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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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난다 2008년 09월 21일 10시 22분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발제문 너무 감사합니다.^^

    요즘, 학생 개개인의 자유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학생들을 어디까지 규제를 해야하는 걸까? 하는 고민이죠.
    그리고 학교 현장에선 개인의 자유보다는 규제에 더 많이 치중한다는 것이 문제인데, 결국 그것의 파헤쳐보면 학교, 교사들 편하려고 학생들을 규제하게 된다는 것이죠.

    제수업은 자유롭게 토론하며 기획안을 만들고 계획을 세우며 진행해야하는 수업입니다. 좀 시끄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신나서 웃고 떠들고...박수를 치며, 가위바위보를 하고 역할을 정하는데, 못하게 하자니 아이들의 활동이 방해받을 것이고..옆반에 너무 시끄럽지않나,,,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사실, 좀 조마조마하기도 했지요. 아이들에게 다른반 수업에 방해되지 않게 적당한 톤으로 토론합시다. 라고 말해도 아이들이 자기들 이야기에 빠지다보면 강한 액션이 나오더라구요. 결국 감시자인 교감에게 한소리 들었지요. 뭐 물론 제 수업은 창의성을 요하는 영상수업이며 지나치게 틀에박힌 수업방식으로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고 설명드리긴 했지만요..


    현재 대부분의 학교 교실들이 밀집해있고 여유있는 공간이 없다보니,,자유로운 토론수업에 지장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현재 학교는 공간구조 및 시간에 있어서 기준 자체가 지나치게 구속, 규제를 한다는 것입니다. 수업시간중에 학교밖에 나가면 큰일나는줄 아는 자기규제. 학교안에서는 다 안전하고 학교울타리 밖은 위험하다. 학교와 교사들의 너무 지나친 자만 아닐까요?

  2. 아난다 2008년 09월 21일 10시 25분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릴때부터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면 반드시 타인의 저항에 부딪침에 익숙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좀 더 나이를 먹으면 모든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기에 서로 상대의 저항이 될 수 있음을 터득하고, 타인의 목적 성취를 허용할때 자신의 목적도 성취할 수 있음을 터득하도록 하라고 제안하고 있다. 그리하여 자신의 자유를 사용하는 방법을 익히게 될때, 이것이 인격교육이라고 불리게 된다."

    이부분 월요일 조회시간에 아이들에게 이야기해주어야 겠습니다.^^

    • BlogIcon amadeus 2008년 09월 21일 21시 23분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 부분이 사실은 5~6세 아동들에 대한 이야기고, 칸트의 교육은 16세면 종료되는것인데 우리나라는 어떻게 된게, 초등학생이나 고등학생이나 똑 같이 훈육의 문제에 직면하고 있으니 참 머리아픕니다.

      고등학생에게까지 훈육이 가해지는데, 실상은 그 어느단계에서도 훈육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죠.

  3. BlogIcon khj4435 2008년 10월 06일 14시 04분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로그인 문제로 책은 읽은지 오래됐는데~ 이제야 글 올립니다.
    그래서 머리에 있었던 게 다 날라갔다는거 ㅜ.ㅜ 그래서 두서 없이 올립니다.
    일단 느낀 점은 확실히 공교육의 모범답안지스럽달까. 학교라는 제도안에서 다수를 가르쳐야할 필요가 있는 공교육의 눈으로 봤을때 양육-훈육-지식교육-도덕교육의 단계는 확실히 깔끔합니다. 다른 느낌 하나는 칸트는 참으로 긍정적인 양반이셨다고 할까. 모두가 공공 선의 도덕을 위해 노력할꺼라는 이 믿음~! 다분히 칸트스럽달까.
    읽으면서 답답했던 몇 가지는 역시 교육은 이론이 아닌 실천이라는 부분이지요. 네~ 아주 좋은 이론이다 이겁니다. 쳇째, 훈육~! 필요하지요. 탈근대이론을 배우며 물론 학교제도 자체에 대한 의심과 대안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일단 여기서 이 부분은 접도록하지요. 어찌됐던 제도권 안의 공교육에서 탈주선을 타는 이야기는 딴이야기가 될듯하고 사실 공교육안에서 제도 혹은 규제라는 틀을 인정하고 들어가야하니까요. 그러니까 다시 훈육~! 으로 돌아가서 네! 필요합니다. 하지만 칸드 역시 엄마들의 치맛바람과 국가의 이익개입 등을 비난한 바 있듯 옛날이나 지금이나 문제는 전혀 개선되지 않고 늘 그 문제가 그 문제로 남아있다는 것이지요. "저학년때 엄격한 훈육교육을 한다."에 동의할 엄마들이 몇이나 있을지. 문제는 도덕교육도 마찬가지지만 "대체 꼭 지켜야할 덕목이나 도덕이란 대체 무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탈근대에 들어선 우리에겐 다 다를수 있다는 거죠. 도덕이란게 요즘엔 뭐랄까 눈치가 됐다고 할까. 상대화 되었단 말이죠. A군이 슬쩍 어기고 B양이 살며시 안하면 나도 덩달아 안하는 악의 상대화. 특히나 자율성이 강조되는 요즘의 성향에서 규체라는 이름으로 도덕 내지 규범은 해체 당하고 당연 훈육은 구시대적 억압적 이란 말과 함께 오게 되었죠. 하지만 필요하다는 데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정직, 공정, 성실, 공중도덕, 예, 효, 인내 등 어떤 덕목이 필요하고 어떻게 훈육을 하시겠는지요? 노자는 덕이 없어 인의예지가 생겼다고 하더군요. 그렇다고 노자처럼 그냥 덕만 있으면 돼~ 하는 뜬구름 잡는 이야길 덩치 큰 제도 안에서 할 순 없잖아요.
    둘째, 위와 같은 맥락인데요. 칸트는 자율성을 강조했다는데 물론 동의합니다. 훈육과 자율의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라~ 얼마나 정답스럽습니까. 나도 그건 안다구요~! 문제는 그 조화지요. 정도와 시기와 방법의 문제랄까. 토론이 시끄러운건 당연하다. 정말 그럴까요? 대안학교 비디오 보면서 모든 샘들의 질문은 단 하나였더랬죠. 제들은 왤케 조용해? 분명 우리에게 문제가 있는 거지요. 단순히 다인수 학급의 문제만은 아닐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대로 토론 규범을 익히면 소음과는 다르며 또한 생산적인 토론이란게 있을겁니다. 그렇다고 협동학습의 그 망할 테크닉-예컨데, 발언은 몇 초씩 돌아가며 모두하고, 일감을 철저히 분배하고, 종료시 진행자가 손을 들면 모두가 다 한 손을 들어 조용해지길 기다리고- 물론 이 중 몇 가지는 필요하지만 내 말은 단순히 테크닉에만 치중하진 말아야한다는 뜻임. 그 부드러움 내지는 유쾌한 분위기라는 거, 경직되거나 개판이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닌 그 중간이란거 그게 어렵다는 거지요. 자율성도 마찬가지인데요. 자율성이라는 건(말이 아닌 실천의 경우) 대체로 수고스럽지요. 과제탐구학습 같은 경우 몇명의 아이들이 제대로 할 것인가. 교육과정및 학교의 재량권 등을 발휘하는 수고스러움을 어떤 교사나 학교가 애써 하겠는가. 어차피 시험점수 위주로 돌아가는 사회구조 아래서 열린 지식이란게 어느 정도나 가능한가. 우리는 이 모든걸 위해 애써 배우고 연대할 수 있는가.

    • BlogIcon amadeus 2008년 10월 07일 11시 10분  댓글주소  수정/삭제

      바로 이 지점 "훈육'의 문제, "쟤들은 왜 이렇게 조용해?" 이 지점에서 탈근대 이론은 무력해지고, 니체는 머리에 권총을 쏘게 됩니다. 그런데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릴때는 훈육이라는 것은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공자도 열 다섯 이전에는 일어서고, 앉고, 들어가고, 나가고 하는 법, 그리고 노래하고 듣는 법 이런것만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훈육-감성 순서로 나가는 거죠.그래서 훈육은 덕목론과는 거리가 있다고 봅니다. 다만 그 상황에서 내가 마음대로 행동한다면 타인의 저항에 부딪침을 경험하게 하는 것, 그래서 서로가 상대에게 저항이 되는 상태를 최소화하는 행동의 조절이 훈육이 되겠죠.

      요즘 어머니들이 "어릴때는 훈육"이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그 어머니들이 틀렸다고 봅니다. 훈육안된 아이들이 그 상태로 나이를 먹어서 결국은 고등학교 졸업할때까지도 훈육이 계속 교육의 중심에 자리잡고 끊임없는 갈등의 원천이 되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그러면서 정작 훈육은 되지도 않죠. 그게 소위 시민의식으로 나타나고....
      유럽을 보면 어릴때는 아주 엄하게 훈육이 이뤄지는데, 4학년 정도만 되면 상당히 자율적이 되기 시작하다가, 고등학생쯤 되면 담임이고 뭐고 없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초1부터 고3까지 모두 담임이 앵앵 잔소리 하는 시스템인데, 그렇게 12년을 훈육한 결과가 행사장의 쓰레기, 전철에서 고성의 전화통화라니....

      5학년 이상이 되면 탈인습적 도덕, 즉 훈육의 결과가 아니라 그 규칙이 무엇인지 의미론적으로 접근해서 판단했기에 준수하는 단계에 들어가야 하는데 말입니다.

      사실 칸트의 교육학에서 의미있는 부분은 훈육-도덕을 구별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전자가 아니라 후자를 교육으로, 즉 학교에서 주로 해야 할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가정에서 전자를 하고 있느냐 하는게 문제가 됩니다.

    • BlogIcon amadeus 2008년 10월 07일 11시 25분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런데, 이정도 댓글이면 정리해서 별도 포스팅 해도 좋을듯.